[스크랩] 근심은 알고나면 허수아비다 / 이외수

옥야沃野 2010. 5. 23. 14:35

 

 

         


        나는 근심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는다.
        근심은 알고 나면 허수아비다.

        곡식이 익어가는 들판으로 가서 허기를 채우려면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복병들이다.
        하지만 어떤 참새라도 그 복병들을
        근심할 필요는 없다.

        허수아비는 무기력의 표본이다.
        망원렌즈가 장착된 최신식 장총을
        소지하고 있어도 방아쇠를 당길 능력이 없다.

        자기 딴에는 대단히 위협적인 모습으로
        눈을 부릅뜬 채 들판을 사수하고 있지만,
        유사이래로 허수아비에게 붙잡혀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어버린 참새는 한 마리도 없다.

        다만 소심한 참새만이 제풀에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의 심장을 위축시켜 우환을 초래할 뿐이다.

        나는 열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스무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서른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마흔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그런데 그 때의 근심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지금은 흔적조차도 찾을 길이 없다.

        근심에 집착할수록 포박은 강력해지고,
        근심에 무심할수록 포박은 허술해진다.

        하지만 어떤 포박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1백 퍼센트 소멸해 버린다.
        이 세상 시계들이 모조리 작동을
        멈춘다 하더라도 시간은 흐른다.

        지금 아무리 크나큰 근심이
        나를 포박하고 있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하고야 만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런데 내가 왜 시간이 흐르면 1백 퍼센트
        소멸해 버리는 무기력의 표본 허수아비에 대해
        근심하겠는가.

        - 이외수: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에서-
          *Y-Club*

     

    출처 :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글쓴이 : 우보(소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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