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매화/근원수필

옥야沃野 2008. 10. 30. 00:12


구암 작품

매화梅花/근원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디다. 그 수묵 빛깔로 퇴색해 버린 장지 도배에 스며드는 묵흔처럼 어렴풋이 한두 개씩 살이 나타나는 완지창 위로 어쩌면 그렇게도 소담스런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도 고요하게 필 수가 있습니까.

실례의 말씀이오나 '하도 오래간만에 우리 저녁이나 같이 하자' 고 청하신 선생의 말씀에 서슴지 않고 응한 것 도 실은 선생을 대한다는 기쁨보다는 댁에 매화가 만발 하다는 소식을 들은 때문입니다. 십 리나 되는 비탈길을 얼음 빙판에 코방아를 찧어 가면서 그 초라한 선생의 서재를 황혼녘에 찾아간 이유도 댁의 매화를 달과 함께 보려 함이었습니다.

매화에 달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흔히 세상에서 매화를 말할 때 암향暗香과 달과 황혼을 들더군요. 선생의 서재를 황혼에 달과 함께 찾은 나도 속물이거 니와, 너무나 유명한 임포林蒲의 시가 때로는 매화를 좀 더 신선하게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방해물이 되기도 하는 것입디다.

화초를 완상하는 데도 매너리즘이 필요할 까닭이 있나요.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자못 성관盛觀으로 피어 있는 그 앞에 토끼처럼 경이의 눈으로 쪼그리고 앉은 나에게 두 보의 시구나 혹은 화정和靖의 고사가 매화의 품위를 좌우 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하고많은 화초 중에 하필 매화만이 좋으란 법이 어디 있나요. 정이 든다는 데는 아무런 조건이 필요하지 않는 가 봅디다.

계모 �에 자란 자식은 배불리 먹어도 살이 찌는 법이 없고, 남자가 심은 난초는 자라기는 하되 꽃다움이 없다는군요.

대개 정이 통하지 않은 까닭이라 합니다.
그 동안 나는 많은 화초를 심었습니다. 봄에 진달래와 철쭉을 길렀고, 여름에 월계와 목련과 핏빛처럼 곱게 피는 달리아며, 가을엔 울 밑에 국화도 심어 보았고, 겨울이면 내 책상머리에 물결 같은 난초와 색시 같은 수선이며, 단아한 선비처럼 매화분을 놓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철 따라 어느 꽃 어느 풀이 아름답고 곱지 않은 것이 있으리오마는 한 해 두 해 지나는 동안 내 머리에서 모든 종시 사라지지 않는 꽃 매화만이 유령처럼 내 신변을 휩싸고 떠날 줄을 모르는구려.

매화의 아름다움이 어디 있느냐구요?
세인이 말하기를 매화는 늙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늙은 등걸이 용의 몸뚱어리처럼 뒤틀려 올라간 곳에 성긴 가지가 군데군데 뻗고 그 위에 띄엄띄엄 몇 개씩 꽃이 피 는 데 품위가 있다고 합니다.

매화는 어느 꽃보다 유덕한 그 암향이 좋다 합니다. 백화百花가 없는 빙설 속에서 홀로 소리쳐 피는 꽃이 매화밖에 어디 있느냐 합니다.

혹은 이러한 조건들이 매화를 앎답게 꾸리는 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매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실로 이러한 많 은 조건이 필요 없는 곳에 있습니다.
그를 대하매 아무런 조건 없이 내 마음이 황홀해지는 데야 어찌하리까.

매화는 그 둥치를 꾸미지 않아도 좋습니다. 제 자라고 싶은 대로 우뚝 뻗어서 피고 싶은 대로 피어 오르는 꽃들 이 가다가 훌쩍 향기를 보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제 가 방 한구석에 있는 체도 않고 은사隱士처럼 겸허하게 앉아 있는 품이 그럴 듯합니다.

나는 구름같이 핀 매화 앞에 단정히 앉아 행여나 풍겨 오는 암향이 다칠세라 호흡도 가다듬어 쉬면서 격동하는 심장을 가라앉히기에 힘을 씁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나에게 곧 무슨 이야긴지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매화를 대할 때의 이 경건해지는 마음이 위대한 예술 을 감상할 때의 심경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내 눈앞에 한 개의 대리석상이 떠오릅니다. 희랍에서 도 유명한 피디어스의 작품인가 봅니다.

다음에 운강雲岡과 용문龍門의 거대한 석불들이 아름 다운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서 내 눈앞에 황홀하게 나타 납니다.

그러나 잠시후 여러 환영들은 사라지고 신라의 석불이 그 부드러운 곡선을 공중에 그리며 아무런 조건도 없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자세로 내 눈을 어지럽고 황홀하게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다시 희멀건 조선조의 백사기를 봅니 니다. 희미한 보름달처럼 아름답게 조금도 그이 존재를 자랑함이 없이 의젓이 제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 수줍 어하는 품이 소리쳐 불러도 대답할 줄 모를 것 같구려. 고동(古銅)의 빛이 제아무리 곱다한들 용천 龍泉요의 품이 제아무리 높다한들 어렇게도 적막한 아름다음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핀 그 앞에서 나의 환상은 한없 이 전개됩니다. 그러다 다음 순간 나는 매화와 석불과 백 사기의 존재를 모조리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잔잔한 물 결처럼 내 마음은 다시 고요해집니다. 있는 듯 만 듯한 향기가 내 코를 스치는구려. 내 옆에 선생이 막 책장을 넘기시는 줄 어찌 알았으리요.

요즈음은 턱없이 분주한 새상이올시다. 나 남 할 것 없 이 몸보다는 마음이 더 분주한 세상이올시다. 바로 며칠 전이었던가요. 어느 친구를 만났을 때 내가 "X선생 댁에 매화가 피었다니 구경이나 갈까?" 하였더니 내 말이 맺기도 전에 그는"자네도 깨 한가로운 사람일 " 하고 조소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 나는 먼산만 바라보았습다
어쩌다가 우리는 이다지도 바빠졌는가. 물에 빠져 금 시에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그 친구 인사라도 한 자였다 면 건져 주었을 걸' 하는 영국풍의 침착성은 못 가졌다 치더라도, 이 커피는 맛이 좋으니 언짢으니 이 그림은 잘되었느니 못되었느니 하는 터에 빙설을 누(屢)경(俓)하여 지루 하게 피어난 애련한 매화를 완상할 여유조차 없는 이다지도 냉회(冷灰)같이 식어 버린 우리네 마음이리까?

金瑢俊 : 1904~1967
화가 수필가 월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