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수선해서 마음 둘 데 없을 때는 그림과 소일하며 심신을 가라앉히는 것이 상책인지 모른다. 하지만 근래 화단 상황을 보면 정서적인 안정은커녕 괜히 마음만 더 심란해지는 그림들이 적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지 시선만 사로잡겠다는 조급함에 미적 가치를 간과한 채 기발한 아이디어만 양산해내는 식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미술애호가들은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다. 어느 길을 따라야 할지 막막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획된 ‘한국의 바람’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전통미술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들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돌아보게 한다. 아무리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예술의 본질적인 가치는 변하지 않건만 적지 않은 작가들이 이를 간과하고 있다. 새로운 미술이라는 것도 지나고 보면 그저 한 순간 유행일 뿐이었음을 깨닫기 어렵지 않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전통적인 가치가 가지고 있는 힘과 영향력이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통적인 가치야말로 오랜 세월을 거친 경험의 축적이 만들어낸 삶의 지혜, 그 정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미래지향적인 인간 삶에서 필연적인 일이지만 미경험의 세계이기에 모험이 따르고 불확실성이 높다. 어쩌면 지금처럼 어수선한 시절에는 선인들이 쌓아온 경험의 축적을 통해 만들어진 전통적인 가치에서 삶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 옳은 태도인지 모른다. 특히 예술창작에서는 전통적인 가치를 숙지하고 그로부터 답을 구한다면 어수선한 분위기에서도 스스로 밝은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종로미술협회가 주최하는 ‘2010 한국의 바람’전은 시의적절한 기획이 아닌가 싶다. 부채에 그림을 그리는 선면회화를 통해 전통적인 가치를 되새겨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기에 그렇다. 물론 선면회화만으로 전시회를 여는 것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부채그림은 전통회화의 한 장르로 인식될 만큼 보편적인 회화양식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는 기존의 선면회화전과는 다른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선면회화의 새로운 가능성, 즉 현대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전통회화의 영역을 넘어, 보다 광활한 세계로 조형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것이다.
부채라는 생활기물에다 직접 그림을 그린다는 발상은 다름 아닌 선비정신의 실용화라고 할 수 있다. 화선지에 그림을 그려 표구장식을 해서 벽에다 걸어놓고 감상하는 일반적인 그림과 달리 여름철 더위를 식히는 부채에다 그림을 그려 넣음으로써 예술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선비문화의 단면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하는 선비문화의 특질을 보여주는 선면회화, 즉 부채그림을 통해 전통적인 가치를 반추하며 그 정신을 이어가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선비문화의 정신 및 멋이 어우러진 선면회화는 전통적인 가치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가를 명쾌히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회를 ‘한국의 바람’전이라고 명명한 것은 최근 세계적으로 확산돼 가고 있는 ‘한류’와의 연관성에 대한 탐색의 의미도 있다. 다시 말해 ‘한류’가 한국문화를 세계적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기운, 즉 바람이라고 할 때 실생활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부채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결부되는 것이다. ‘한국방문의 해’와 때를 맞춰 한국의 수도 그 중심부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것도 한국 전통회화인 선면회화를 새롭게 인식시키는 그 시발점으로서의 상징적인 메시지를 담고자 하는데 있다.
선면회화는 비록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공간에 그림을 그려 넣어야 하므로 소재 및 크기에 제한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작은 공간에 작가의 사상과 회화적인 역량을 응집시킴으로써 회화적인 수준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작가마다 자신의 조형적인 능력을 극대화하고 압축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물리칠 수 없기에 크기의 한계에 머물지 않는 예술적인 수준을 유지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한국의 바람’전은 그 어떤 형태의 전시와 견주어도 내용적으로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특히 문호를 개방하여 전통회화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현대회화 작가들도 참여함으로써 선면회화는 전통미술이라는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또한 한국을 대표할 만한 유명 작가들이 다수 포함, 전시회의 질적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리고 있다. 이는 일찍이 시도된 일이 없는 새로운 기획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일이다. 실제로 이번 ‘한국의 바람’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선면회화는 보다 광의적인 개념의 회화 장르로서 발전시켜 갈 수 있다는 가능성과 조우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선면회화가 전통회화의 범주에서 벗어나 한국을 상징하는 회화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하는 그 기반을 다지는 일일 수도 있다. 뿐더러 우리들의 실생활에서 쓰이는 생활미술로서의 실용성을 통해 한국전통문화의 멋과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다. 따라서 합죽선이 한국고유의 발명품이라는 점에서 볼 때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선면회화를 ‘한류’의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것이다.
부채는 일반적으로 대나무와 한지를 이용해 만들어진다. 이번 ‘한국의 바람’전에 부채와 연관성이 있는 전통예술 공연이 함께 하는 것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축하공연으로 대금연주와 살풀이춤이 마련되었는데, 대금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전통악기이고, 전통무용인 살풀이에서는 하얀 천 대신에 합죽선을 이용하게 된다. 이처럼 타 장르의 전통예술과의 연관성을 통해 한국예술의 공통성 또는 특성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한국의 바람’전은 이전의 선면회화 전시회와는 다른 목표 및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회화 전시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통문화와의 연관성을 통해 전통회화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시대가 변하면 그 시대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회화 또한 시대가 요구하는 또는 시대에 맞는 조형감각을 반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재료는 그대로이되 조형언어 및 어법은 새로운 강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한국의 바람’전은 선면회화라는 전통적인 가치를 그대로 살리면서도 현대라는 시제에 부응하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운동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전통회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야말로 실용성을 통해 전통미술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하는 것이다.